2017. 4. 15. 프라이드 낮공.
CAST: 성두섭, 장율, 이진희, 양승리
01.
프라이드는 항상 나에게 선물같은 연극이다.
"프라이드 시작합니다." 라는 말은 가슴을 떨리게 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이미 다 알고 있는데도, 프라이드는 늘 새롭다.
02.
성두섭 배우의 1958년 필립은 오히려 더 강하고 단단해졌다.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올리버와의 순간을 실비아에게 숨기는 것엔 미숙하지만
조금 더 자신을, '진정한 필립'을 숨기는 데엔 능숙한 필립이 되어 있었다고 해야할까.
여전히 진정한 자신에게 닿을 용기는 없는,
그런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필립.
그리고 여전히 느껴지는 미묘한 공기, 그리고 그 미묘한 공기를 느끼는 듯한 이진희 배우의 실비아.
03.
장율 배우의 2017년 올리버는 여전히 뻔뻔하고, 사랑받을 자격은 없는데(?) 사랑받고 싶어하는 (?) 올리버의 느낌.
무엇이 잘못인지는 모르지만, 잘못은 한 것 같고.
(그것도 왠지 외압에 의해 잘못됐구나, 느끼고 있는 듯. 실비아나, 혹은 바뀐 필립의 태도 탓에.)
그 점이 필립의 화를 더 돋구고, 더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특히나 성두섭 배우의 필립은 올리버를 정말 많이 사랑하는 데!
2017년의 장율 배우의 올리버를 보고 있자면, 진짜 얄밉다.
하지만 그의 '어떤 점'의 이유를 알고 있는 탓에 미워만 할 순 없는.
필립을 적극적으로 붙잡을 수 없는 올리버와,
올리버를 떠나면서도 미련을 놓을 수도 없는 필립.
두 사람 사이의 긴 이야기, 역사.
그 이야기와 역사가 보이진 않지만, 점점 상상할 수 있게 되는 기분.
04.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실비아.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진실을 기다리고 있지만,
진실을 던져주지 않는 필립.
이미 진실 앞에 설 준비가 된 실비아와
진실 앞에서 무너질 수 밖에 없는 필립.
그리고 진실과 멀어지는 두 사람.
멀어지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에서.
두 배의, 세 배의 상처를 받고 있는 두 사람.
05.
실비아는 항상 그 자리에, 변함 없이 서 있는 사람 같다.
있던 그 곳에서 올리버를 바라보고, 필립을 바라보는.
필립과 올리버의 곁에서 더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서 있지만
누구보다도 두 사람을 잘 알기에 그저 쳐다보기만 하는,
하지만 가끔은 옆구리를 쿡쿡 찔러줄 수 있는 위트있는 조력자.
그리고 여전히 철 없는 올리버.
06.
상처 주고, 상처 받는 필립.
상처 받고, 상처 주는 올리버.
필립은 나약한 사람이라 진실을 마주하지 못한다고,
올리버의 이야기를 필립이 무시하고 있다고,
나쁘고 모진 말로 애써 상처를 주는 올리버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성두섭 배우의 필립은 항상 상처를 주면서도 더 많은 상처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작은 말 하나하나를 힘겹게 뱉으며,
어떻게든 자신을, 그리고 올리버를 '틀리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정말로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틀리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머리와,
올리버를 사랑하는 마음.
두 사이의 모순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달까.
오히려 올리버가 필립을 괴롭히고, 필립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드는.
사랑하는 올리버의 젖은 모습, 상처, 작아진 뒷모습에
누구보다 마음 아파하는 필립.
07.
처음으로 느꼈던 달라진 올리버.
필립과의 일년여 반(정확히는 며칠 후면 19개월)의 시간동안
자신도 모르게 '필립과 닮아가는' 올리버의 모습을 본 것 같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또 곱씹고, 진중하게 받아들이는 사람.
그런 필립이라는 사람을 사랑한,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닮아가는 올리버의 모습을 엿본 것 같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08.
이진희 배우의 실비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외유내강, 이 가장 잘 어울릴까.
하지만 여전히 올리버를 떠나보내고 난 후 흘리는 눈물은
어떤 실비아의 눈물보다 가슴아프다.
올리버를 소중하게 여기고,
필립을 소중하게 여기는 실비아의 마음이 가득 담긴 눈물처럼 느껴진다.
자신의 사랑 앞에 조금은 이기적이었던 올리버와 필립을 모두 포용하는
마음이 따뜻한, 누구보다도 다정한.
두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실비아.
09.
장율 배우의 올리버와 이진희 배우의 실비아는 찰떡과 같았다.
10.
조금 더 강해진 성두섭 배우의 필립.
처음 본 날은 마치 올리버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혹은 그 얼굴을 가린 채 치료에 임했을 것 같았는 데
이번에는 그냥 치료를 거부했을 것 같더라.
올리버에 대한 사랑이 단단해지고,
의사와의 질의응답에서 자신을 찾아간 느낌.
실비아가 떠난 후, 자신을 찾아가며
올리버를 그리워했을 것 같은.
11.
필립과 올리버, 그리고 실비아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조금씩 천천히,
이해하고 변해가며.
그 자리에서 지켜보며.
12.
2017년의 필립과 올리버는 행복할 거 같은데,
1958년의 필립과 올리버는 어땠을까.
항상 생각하게 된다.
필립은 실비아의 빈자리를 잘 채우고 있을까.
올리버와 실비아는 다른 동화를 썼을까.
필립은 벨리핀치 이야기를 보며 가슴아파하지 않을까.
아니면 아프리카로 떠났을까,
올리버의 흔적을 찾아 그리스 아테네의 신전을 떠돌고 있진 않을까.
올리버는 도서관에 앉아, 필립의 이야기를 적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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